top of page

-2017-

실제가 되고 싶은 그림

허나영(미술비평)

Hur, Nayoung(Art Critic)

파라시오스에게 지고 난후, 제욱시스는 쓴 침을 삼키며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모두의 눈을 속이는 포도를 그리리라.’ 파라시오스가 자신의 눈을 속인 천 그림은 너무나 생생했고, 그 생생함을 능가하려면 고작 새의 눈을 속인 포도그림이 아니라 실제의 포도와 견주어 구분이 안 될 정도의 그림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 십여 년간 포도만을 그려온 김대연의 목표도 바로 그 실제 포도이다. 과즙이 가득하고, 포도를 보면서 그 맛을 바로 생각하고 달콤함이 입안에 들어온 듯한 그 생생한 포도의 느낌을 김대연은 작품 속에 담고자 했다.

포도와 경쟁하는 포도 그림

김대연의 포도를 보면 회화에 있어서 오래된 문제 중 하나인 재현(representation)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재현은 어떠한 대상을 다시 표현하는 것으로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명하며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라 평가절하하기도 하였다.

Grapes 116.7x75cm oil on canvas 2017.jpg

​Grapes 116.7x75cm oil on canvas 2017

하지만 오랫동안 재현은 인류에게 있어 회화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제욱시스가 그러하며, 신라의 솔거 또한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사진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회화에 있어서 재현의 역할은 그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회화에 대한 고민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 다양함은 현대미술의 역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연의 포도그림은 너무나 실제 같기에 그 재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예민한 구분의 눈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포도 ‘사진’과 김대연의 포도 ‘그림’과의 차이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진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했다. 이후 미국과 세계 미술의 영향을 받은 한국 역시 사진을 바탕으로 한 극사실적 회화가 늘어났다. 하지만 김대연은 사진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지 않는다. 첫 시작은 수많은 포도를 바닥에 깔고 사진을 찍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이를 컴퓨터 그래픽의 후작업으로 더욱 ‘포도’같이 보이게 수정을 한다. 입체감을 느낄 수 있게 포도 알갱이의 크기를 늘리거나 줄이기도 하고, 덧붙이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또한 색감과 빛을 조정함으로써 보다 생생한 포도의 모습을 찾는다. 이후 캔버스에 옮길 때에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생생한 느낌이 들도록 끊임없이 관찰하고 고민하며 포도를 그려나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대연의 작품 속 포도와 똑같은 실제 포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처음 카메라로 포착한 포도의 모습은 처음에는 디지털 흔적을 지표(index)와 같이 남겼을지 모르지만, 후작업을 통하여 변형되고 최종 그림에서는 본래 대상과 더욱 멀어진 하나의 기표(signifiant)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시뮬라크르(simulacre)에 연결이 될 수도 있다. 너무나 실제 같지만 결국은 직접적 대상이 남지 않은 껍데기의 상태 말이다. 하지만 김대연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욕심을 낸다. 포도에서 실제 포도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관람자가 공감각적 지각을 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빛에 의해 포도 껍질의 반투명함을 보고 그 속에 가득 찬 포도 과즙의 맛을 상상하며 침이 고이고, 당분이 올라온 껍질의 흰 가루를 보면서 달콤한 포도향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그림 속 포도를 마주했을 때 포도 사진이 아닌, 실제 포도가 숨어있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가 십년 동안 포도를 그리면서도 매번 노력하는 방향이다. 그래서 그에게 초기의 포도 작품이 사진과 같다면, 앞으로 몇 년 더 노력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실제 포도 그 자체를 그림에서 느끼는 것이다. 포도의 모방물(imitation)이 아니라, ‘포도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빛을 머금은 산 능선

김대연이 포도 그림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그 생생함은 오랜만에 다시 선보인 풍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풍경화 역시 사진에서 시작된다. 전국의 산하를 다니며 원하는 풍경의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수천 장의 사진 중 선택된 수백 장의 사진을 다시 후 작업으로 붙이고 지우고 덧입히는 작업을 거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화폭에 자신이 그 풍경에서 느낀 이미지를 풍경화로 그린다. 최근 풍경 작업에서는 특히 너른 들판이나 고요한 수면 너머에 있는 산 능선에 주목하고 있다.

Dream View 162x48cm oil on canvas 2017.j

Dream-View 162x48cm oil on canvas 2017

한국의 기와지붕 곡선이 한반도의 산하와 닮아 있다는 한국미술학자들의 의견처럼, 우리가 오고가며 마주치는 산 능선은 뭐라 규정할 수 없는 고요함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해가 지기 시작할 때나 떠오를 때, 완만한 산 능선에 맺힌 빛의 줄기는 사진에 담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움을 갖는다. 그렇기에 김대연은 그 빛을 머금은 산 능선을 세밀한 붓으로 다시 되살려낸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그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김대연은 은은한 빛으로 빛나는 산 능선을 보며 그 너머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상상한다. 우리 눈앞에 있는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곳일 수도 있고, 더 빛나고 가치 있는 만남이 있는 장소일 수도 있다. 아직 가지 않은 곳이기에 우리는 상상을 할 수 있고, 그렇기에 더 빛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요하게 빛을 머금은 산 능선을 그림에서 주목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김대연은 과감하게 전경의 풍경들을 단순화고, 관람자의 시선이 화면의 뒤쪽으로 향하게 한다. 자신이 실제 풍경에서 느꼈던 그 감정이 그림 속에서 되살려지길 바라며 말이다. 이렇듯 김대연은 그저 기계적으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와 감정을 우리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화면을 다듬어 내는데, 이를 작가는 ‘정제미(精製美)’라 이름 붙인다.

Grapes 60.6x50cm oil on canvas 2017.jpg

​Grapes 60x50cm oil on canvas 2017

정제미로 다듬어진 회화

정제미는 사전적으로 정의가 되어 있는 용어는 아니다. 그저 일상어로서 불순문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만든다는 정제를 하나의 방식으로 보고, 김대연은 자신의 회화에서 추구하는 방향성을 설정한다. 이는 언뜻 극사실적 기법으로 그리는 포도와 세밀하게 그려진 산 능선의 굴곡과 모순이 된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포도의 작은 반점이 물방울, 그리고 능선의 나뭇가지 하나 조차도 작가가 철저히 생각하고 의도하여 선택한다는 점에서 정제되어 있다. 작가의 눈이라는 체에서 불순물은 걸러지고 생생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요소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제의 과정은 결국 회화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떻게 보며, 어떻게 그려야하는 지 말이다.

다시 재현의 문제로 돌아가 김대연의 그림을 보자. 김대연은 실제 대상을 그대로 가져온 사진과 같은 기계적 재현이 아닌,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에 따라 선택하여 대상을 그린다. 이는 카메라의 렌즈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인간의 눈이 지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을 통하여 김대연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서 실제의 포도를 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물을 보는 방식은 카메라와 다르기 때문이다. 태어난 후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고,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하면서 갖게 된 인식들을 바탕으로 본다는 형태심리학자 아른하임(Rudolf Arnheim)이 제시한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를 하면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김대연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공감각적인 경험을 시각적 표현으로 재현하고 있다.

작가는 아직 포도 그림과 풍경화 속 산 능선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사진이 아닌 실제 대상과 계속해서 경쟁하며 실제를 뛰어넘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바람이 얼마만큼 시각화가 될지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2015-

​⦁극단의 경지로 끌어올린 김대연 회화의 경이로움

- 김대연의 극사실 회화에 대한 고찰(考察)

   황선형(모리스갤러리, 아트허브 대표)

포도 작가로 유명한 김대연의 극사실(極寫實) 포도 그림은 사진이 갖는 표현의 정교함을 뛰어 넘는 사실적 재현으로 실재와 환영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작품이다.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극단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김대연의 포도 작품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슬을 머금고 역광(逆光)에 비춰진 촉촉한 포도 알갱이는 영롱하고 투명하면서 맑다. 빛의 애무를 받은 포도 알갱이는 형형색색을 띠고 있으며, 포도 표면을 덮고 있는 하얀 당분(糖分)은 더욱 실감나게 포도를 표현해줄 뿐만 아니라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수많은 포도 알갱이들은 군집을 이뤄 포도 송이로 표현되고, 포도 송이들은 여백 없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김대연의 포도 그림은 과연 신의 과일이라 불릴만한 아우라(Aura)를 보여주고 있다. 눈속임 기법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김대연의 포도는 현실의 포도를 뛰어 넘는 것이 사실이다.

2007년경까지 풍경화 작업을 주로 해오던 김대연은 그 이후 과일을 소재로 정물 작업을 간간이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여러 과일 중 하나인 포도로부터 작업에 대한 동기를 부여 받게 된다.

Grapes 2015 oil on canvas 100x55cm  .jpg

​Grapes 100x55cm oil on canvas 2015

포도가 지니고 있는 조형성과 빛에 의한 알갱이의 표현이 자신이 생각하던 회화적 발언의 지향점이 될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포도 작업은 벌써 10여 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작업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포도 작업에 매달릴지 정해 놓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포도 작업이 주는 끊임없는 매력으로부터 기인(起因)한다. 이전의 풍경 작업은 근경, 중경, 원경 세 가지 원근법만으로도 작품의 표현이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포도 작업은 초점을 맞춘 선명한 부분으로부터 그 외의 주변부는 초점의 거리에 따라 선명도가 달라지는 아웃포커싱 원리를 적용함에 따라 알갱이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원근법을 적용해야 한다. 이로 인해 작품은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몽환적인 느낌마저 든다. 결국 이런 특징들은 김대연의 포도 작업이 단지 시간의 공력에 의한 반복만으로 비슷한 작품들을 양산해 내는 것이 아니라, 포도 송이 하나하나마다 갖고 있는 모양새와 알갱이의 배열에 따른 창의적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김대연이 구사하는 극사실 계열의 작품들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중들로부터 각광 받기 시작했으며, 미술계에서도 주류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극사실 회화가 출현한 1970년대의 미술사에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미술을 모방하는 유행쯤으로 폄하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극사실 기법이 한국 미술계에 출현한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격동의 1970년대의 한국 미술계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1970년대는 그 이전의 엥포르멜(Informel)에 대한 대안으로 출현한 단색화(單色化) 작업과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출현한 민중미술이 태동한 시기이며, 또한 그 틈바구니에서 극사실 회화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극사실 회화는 단색화와 민중미술의 확장세에 밀려 미술사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민족주의 정서와 크게 무관하지 않다. 단색화는 한국의 역사와 뿌리에 전통을 둔 고유의 정신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자연과 동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문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민중미술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목판화, 걸개그림과 같은 민중과 밀착된 작품들을 통해 한국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극사실 회화는 외양상 1960년대 미국서 출현한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을 모방하는 아류 정도로 인식되면서 몇몇 동인이 활동하는 정도에서 명맥이 겨우 유지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인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경제 성장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대중들이 문화ㆍ예술 전반에 관심을 가졌으며, 아파트와 같은 서구식 주거 형태가 일반화 되면서 밝고 화사한 작품들을 소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몇몇 동인의 미비한 활동으로 명백을 유지하며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출 것 같았던 위기의 극사실 회화는 극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작품의 소재는 이전의 1970년대 1세대 선배들의 ‘도시화’로 요약되는 소재에서 2000년대 주류를 이루는 2세대 젊은 작가들은 과일, 음식, 신체, 초상, 유리잔, 인형, 풍경, 디지털 이미지와 같이 대중들이 선호하는 다양한 소재들로 전이(轉移) 되었다. 서구 미술의 아류쯤으로 취급 받던 극사실 회화는 이렇게 미술계의 중심부로 부상한 것이다. 결국 한국의 극사실 회화는 시각적 재현에 충실한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는 달리 소재나 내용면에서 작가들의 주관적 감성이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차별화된 한국 미술의 새로운 사조로 서서히 존재감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사본 -IMG_9793.jpg

​Grapes 53x45.5cm oil on canvas 2015

​Grapes 53x45.5cm oil on canvas 2015

김대연은 2000년대 2세대 극사실 계열에서 주목 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김대연의 초기 포도 작업은 바구니에 나열된 군집의 포도를 부감법(俯瞰法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조망법)으로 사진보다 더 정교한 묘사로 포도를 표현했다면, 현재의 작업은 자연의 상태 그대로 이슬을 머금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포도 송이에 역광을 투사(投射)하여 비춰지는 포도의 신비스런 색을 포착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김대연이 추구하는 포도 작업의 정점이다. 순수한 손놀림만으로 포도에 투사되는 빛이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김대연 작품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연은 자신의 포도 작업에 어떤 철학적 의미를 부여 하지 않는다. 단지 회화적 표현으로 극단의 경지를 추구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김대연 작업의 의미가 발화(發火)되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의 극사실 회화가 지향하는 작가의 ‘주관적 감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부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작가노트 | 포도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 지금까지 수많은 포도알을 그려오면서 그 기법이 점점 더 사실적으로 변해왔고, 그래서 ‘극사실작가’라는 수식어도 얻게 되었지만, 사진과 같은 느낌을 탈피해야 된다는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왔다. 자칫 무미건조해 질 수 있는 표면적인 사실감에 대한 집착을 배제하고, 생동감과 실재감에 작업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 포도송이 위로 떨어지는 빛의 느낌, 포도 송이송이 사이에 있는 공기와 공간의 느낌, 그리고 포도 껍질 위로 베어져 나온 당분, 역광을 받았을 때 투명하게 비쳐지는 과육, 이러한 요소들이 감상자의 오감을 자극하여 포도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한다. 주지하다시피 김대연의 극사실 포도 작업은 많은 공력과 수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김대연은 작품을 많이 제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작품 하나하나를 통해 얼마나 새로운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있다.

예술가도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의 구성원에서 예외일 수 없고, 또 가끔은 지금의 작업 방법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김대연은 현재의 작업 방식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회화적 지향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런 목표 의식이 지속된다면 김대연의 포도 작품은 극사실 회화의 백미(白眉)로 대표성을 갖는 작가로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더욱더 김대연의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 2015

-2011-

 김대연의 ‘포도가 익어가는 그림’

서성록(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얼마전에 상영된 제임스 케머론감독의 ‘아바타’는 현란한 CG 기술로 신선한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판도라 행성을 이루는 동식물들의 생생한 움직임과 신비한 풍광은 실물을 방불케 하며 새를 타고 공중전을 펼치는 전투신이랄지 눈부신 색채 등은 보는 사람의 시각을 압도하였다.

영화에서 CG가 실사와 에니메이션의 구분을 없앴다면, 그림에서는 극사실이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흐리게 한다. 기계의 힘도 빌리지만 대부분 수제에 의한 그림이라는 점과 가상현실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영화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3D를 통해 영화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듯이 극사실 역시 공감각의 영역에 도전장을 냈다.

김대연의 그림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사실묘사는 현기증이 날 정도이고 과분(果粉)이 묻어있는 포도를 보고 있자면 마치 포도향이 진동하는 것같아 전시장이 아닌, 과일가게 혹은 과수원에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일으킨다.

김대연이 포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경으로 그 무렵에는 포도와 풍경을 함께 제작하다 2008년 경부터는 본격적으로 포도작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가 한 모티브를 고수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지만 김대연처럼 모양도 같고 색상도 같은 포도송이를 그린다면 상황은 좀 달라질 것이다. 여러 작품을 제작하더라도 결국은 한가지 이미지의 반복 또는 확대재생산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대연이 포도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포도알이 모두 보는 것과 같이 획일적이지 않다는 점과 포도가 지닌 의미를 알려준다. 먼저 우리가 포도를 바라볼 때 포도는 검은 빛을 띠고 있는 것같지만 실은 여러 빛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청포도,자줏빛 포도, 흑포도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Grapes 65x65cm oil oncanvas 2011 kim dae

​Grapes 65x65cm oil on canvas 2011

Red-Grapes 53x45.5cm oil on canvas 2011.

​Grapes 53x45.5cm oil on canvas 2011

그에 의하면, 포도는 외부의 빛을 받을 때 나오는 영롱한 색이 표피를 통과해 가장 매력적인 빛을 띠게 되며 따라서 이 순간을 화면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기계적 전사의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시피 그의 포도그림는 부감법에 의한 것으로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포도밭의 포도가 아니라 수확한  포도를 한데 모아 약간의 높이조절을 통해 얻어진 장면이라는 것이다. 대게의 화가들이 현장감을 살릴 요량으로 구도를 현장에 가깝게 옮기는 데 반해 그의 경우는 ‘연출된 구도’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번 고르게 밑칠을 하고 그 위에 프라이머를 두 번 정도 발라 채색이 잘 되도록 바탕의 정지작업을 거친다. 그러나 광택이 날 정도의 밑칠은 피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붓질효과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지나친 밑칠처리는 실물의 표정을 완벽히 재현했다는 평가를 들을지 모르지만 화면에서 아우라를 지워버리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해서는 조심스런 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사진과 똑같이 보이기보다는 엄연히 회화로서 보여지길 바란다. 

작가는 똑같은 크기의 포도이지만 낱개가 모여 전체를 형성하는 점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포도는 사과나 배처럼 한 알로 존재하기보다는 군집형태를 띤다. 여러 알이 모여 한송이의 포도를 만드는 것이다. 부분과 부분이 도탑게 지내는가 하면 조화를 도모한다. 어떤 것이 다른 것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양상이다.

서구의 하이퍼 리얼리즘이 극도의 사실력을 바탕으로 즉물적 현실을 반영하지만 김대연은 사물이더라도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무언가를 함축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육사의 유명한 시 “내 고장 청포도”에 나오듯이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꾸며/알알이 들어와 박혀” 있는 모습이다. 포도를 통해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풍부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회상에 잠겨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의 포도그림을 보면서 어떤 과정을 통해 성숙되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모진 해풍을 견디며 사는 해당화 못지않게 포도는 매몰찬 비바람과 땡볕을 맞으며 자라난다. 잘 익은 포도일수록 햇볕의 따가움에 익숙해져야 하며 그런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당도가 높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보는 포도는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기 좋게 보이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 순탄치만은 않은 인고의 나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작가는 작품에 약간의 베리에이션을 꾀하고 있다. 포도 이미지를 평면적으로 나열하던 종래 방식에서 벗어나 근작에서는 입체감을 도입하여 중앙의 포도송이가 앞으로 도출된 듯이 입체감을 살려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이 가장 먼저 모아지는 곳은 화면 한복판이며 주위는 응달이 지게 하거나 포커스를 흐릿하게 처리하고 있다. 사진의 아웃포커스처럼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입체감을 띠고 있다.

옛날에는 따듯한 온돌방에 앉아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 찧는 달 이야기를 들었듯이 근래에는 시설을 잘 갖춘 극장에서 환타지영화를 감상하며 상상력을 키운다. 김대연의 그림도 마찬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세시풍속을 담은 풍속화나 명승지나 평화스런 농촌, 산골을 담은 풍경화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풍부한 계절감각과 시적 정취를 느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그림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포도가 아니라 누구나 염원하는 ‘늘 푸른 청춘’과 ‘시들지 않는 생명’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생명의 영원한 상(象)’이 아로새겨져 있는 셈이다. 빛을 받을 때에만 자주빛 속살을 보여주는 포도처럼, 그의 그림은 눈길을 주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보여준다.

-2009-

김대연의 ‘포도’ 그림

- 명증한 시각상과 온화한 감정의 병행

김 영 동 (미술평론가)

김대연의 ‘포도’ 그림 연작을 보면서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를 떠올린다. 그 에피소드 속의 ‘포도’가 일루전이나 시각성의 진실과 관련된 모티프라면 김대연에서는 미적 판타지를 일으키는 소재로서 전유된다. 두 경우 모두 회화를 지배하는 것은 주관적 관념이 아닌, 시각적 본성에 입각해 있다.

김대연은 명증한 재현의 세계를 추구한다. 그의 사실적인 묘사는 아찔할 정도의 실물 느낌을 환기시키지만 ‘트롱프뢰유’ 같은 시각적 착각을 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사물에 다가가는 고도의 핍진성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을 조장하는 장치들을 오히려 피하거나 배제한 화면구성을 보인다. 그런 화면에서 더욱 박진감 있는 묘사는 극사실주의자의 중립적인 물질성에 바싹 다가가지만 여전히 색채와 형태의 순전한 조화를 지향함으로써 자신만의 차별화된 미학을 확보한다.

최근 대형 ‘포도’ 그림에서는 화면의 가장자리나 배경 공간을 따로 두지 않고 계속 확장되는 평면성과 그 속에 투영시킬 깊이에 천착한다. 모티프를 무한히 전개시키면서 평면성과 깊이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생동감 넘치는 명증한 시각성의 출현은 사물의 반영에서 뿐만 아니라 그림의 표면층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단순한 대상의 모방이란 느낌을 지운다.

Grapes 110x110cm oil on canvas  2009 김대연

​Grapes 110x110cm oil on canvas 2009

Grapes 180x90cm oil on canvas  2009.jpg

그는 어떤 사물을 재현하든 ‘정제된 색채와 형상’에 이르도록 추구하기 때문에 이런 역설이 가능하다. 따라서 사실적인 묘사가 줄 수 있는 지루함도 상투적인 미도 넘어설 수 있다.

대상에서 출발했으나 객관적인 묘사에 그치지 않고 온화한 감정을 담는 표현으로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가는 소재의 탐구를 통해 열정을 소진하고 항상 습관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려고 애쓴다.

 

2009. 4. 14

​Grapes180x90cm oil on canvas 2009

bottom of page